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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생각

설날의 기억

by 그럼그렇지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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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다가오고 있다. 매년 음력으로 같은 날 찾아오지만 이젠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설은 정말 신나는 날이었다. 학교는 어차피 방학이라 안 가도 되지만 반가운 친척이 찾아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세뱃돈은 항상 덤이었다. 충분히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일어날 때면 이미 부엌에서는 음식 준비 소리로 분주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전 날 장을 보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일찍부터 음식 준비를 시작하실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어머니께서 전과 튀김을 만들 준비를 해 두시면 아침 늦게 누나들이 일어나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전을 부치고 튀김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거의 매년 같은 메뉴로 준비하였다. 주로 많이 한 메뉴는 동그랑땡, 오징어튀김, 고구마튀김, 야채 전, 동태 전, 오색꼬치 전, 소시지부침이었던 거 같다. 추운 마루에 얇은 패딩 조끼를 입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 명절의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그 때 어머니는 단 한순간도 쉬시지 않은 것 같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시고 일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작은 집은 항상 음식 준비가 거의 끝나는 오후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잘 말을 안 하시지만, 누나들은 그게 많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명절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어머니만 일을 하셔서 너무 싫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음식 준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칼질과 설거지를 하셨을지... 그 당시 나는 친척이 와 마냥 좋기만 했다. 

오후 늦게 쯤 음식 준비가 마무리 될 쯤이면 음식준비를 한 여자들은 목욕을 가거나 잠을 자고 잠시 쉰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시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셨다. 매 끼 열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일 밥을 하셔야 했다. 모든 반찬은 모두 다른 접시에 담고 인원이 많아 몇 개의 상이 차려졌다. 다 먹고 다시 설거지를 하면 저녁 9시쯤 됐던 것 같다. 그제야 어머니의 길었던 하루가 잠시 멈춰진다. 

명절 당일 다시 칼질 소리에 잠이 깨면 남자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여자들은 차례준비에 한창이다. 우리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함께 밥을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주 기다란 자개상이 놓이고 모든 식구가 길게 앉아 밥을 먹는다. 그때 까지도 제대로 상에 앉지 못하셨다. 그때는 그것을 모두 보고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기억을 되짚어보니 어머니는 그러셨다. 십몇 년을 그렇게 사셨다. 그게 당연한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 나 나이의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셨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 삶에 남았다. 때로는 과하리 만큼 남을 챙기는 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나보다는 남을 챙기고, 남의 기분을 생각하고 항상 분위기를 생각한다. 그런 나의 모습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가끔 나 자신을 옭아매고 힘에 부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제 어머니는 연로하시고 기력이 없으시다. 그래서 명절 전날 집에서 음식을 준비해여 내가 본가로 간다. 한동안 음식을 준비해서 본가로 갔지만 본가에서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아무래도 어머니가 많이 움직이셔야 했고,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전을 부치고, 고기를 재우고 필요한 음식을 사서 명절 당일에 간다. 전 날 가서 하루 자고 와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매끼 준비를 위해 어머니가 움직이셔야 한다. 가만히 계시면 좋겠지만 가만히 계시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명절 당일 아침에 일찍 가서 누나들을 보고 저녁을 먹고 오는 것으로 정하였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명절은 어떤 기억, 어떤 느낌, 어떤 감정으로 기억 할지.명절이 예전보다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다 보니 그 농도가 나보다 짙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가족이 모이고 용돈을 받고 설레고 흥분되는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설 때가 되면 그 시절을 기억하고 몇 분 아니 몇 초만이라도 추억에 젖을 정도만 돼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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