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 섰다.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TJ가 서 있었다. 갓 스물을 넘겼을 때와 같이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세월의 때가 묻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TJ를 볼 때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야생마가 생각났다. 아시아인 답지 않게 다리가 길고 상체가 짧은 편이었고, 긴 다리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라인은 근육으로 탄탄했다. 하체에 비해 짧은 상체는 군살 없이 매끄럽고 과하지 않은 근육이 멋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거무잡잡한 피부는 근육을 더 도드라져 보이고 탄탄하며 심지어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멋진 몸은 물론 타고난 것도 있지만 운동으로 잘 가꾸어 놓은 조각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과 작은 머리는 체형을 더욱 빛나게 했다.
나도 모르게 TJ를 꽉 껴안았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익숙하고 상상했던 그대로의 몸이 손에 느껴졌다. 너무 좋았다. 어찌된 일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나도 모르게 쉴 새 없이 질문이 나왔다. 그러나 TJ는 여유로운 표정과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TJ와는 그렇게 많이 친하지 않았다. 다만 초등학교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 까지 오랫동안 그리고 꾸준히 만나왔다. 나는 시골 초등학교 분교를 다녔고 TJ는 본교에 다녔다. 처음 만난 것은 학교가 분교로 바뀌고 처음 같이 실시한 교내 야영때 였다. 그리고 소재한 면에 중학교가 하나였기 때문에 같은 중학교를 다녔고 인연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다. 대학교 입학 후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은 공군에 입대하여 같은 병과 가까운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대학교를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고향이 같았기 때문에 명절이나 친구들 모임이 있을 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간 만나지 못 한 것 같다. 다시 만난것은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나는 이미 결혼하여 첫째를 낳은 상태였다. 와이프, 아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한 나는 다른친구 YK를 만났다. 멀리에서 볼 때 그의 옆에는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 구부정했던 노인은 TJ였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 있지. TJ는 본인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 상태라고. 고작 30대 초반의 나이인데 안경을 쓴 얼굴의 탄력이 사라지고 부어보였다. 그리고 약간 허리가 굽어 키는 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해 줄 말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저 반갑게 인사하고 지난 이야기를 하는것이 고작이었다.
몇년 뒤 둘째가 태어났고 회사와 육아로 바쁘고 고된 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부고가 날아들었다. TJ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다시 건강해질 걸로 믿고 있었는데. 회사와 가족에게 상황을 전하고 급히 장례식장으로 갔다. 몇몇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이미 와 있었다. 눈물이 났다.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던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어 집에서 용돈 받아 쓰는 것이 너무 미안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너무나도 이해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경제 활동을 시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가정을 꾸려가는데 아직도 집에서 용돈을 받아 쓰는 자신이 작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는 몸이 아프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대학교 입학 직후부터 컴퓨터 게임에 빠져 밤이 새도록 담배를 피우며 게임을 했고 여자친구도 있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러 다녔다고 했다. 몸을 너무 혹사시킨 것이다. 대학교 때 사고로 친구들 잃은 적이 있지만 몸이 아파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죽음이 멀지 않은 곳에 항상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튼튼한 육체를 가진 친구 중의 한 명이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장례식장은 대부분은 초중고 친구들로 채워졌고 화장터 마지막까지 동행한 것도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사이들 뿐이었다. 이를 보는 부모님 심정은 어떠셨을까. 한 사람의 부모로서 그 아픔은 상상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하얗고 환한 화장실 안에서 TJ는 너무도 건강하고 매끈한 모습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TJ는 TJ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뒤 건강이 좋지 않아 뒤따라 세상을 떠나신 TJ의 아버지께서도 너무 잘 지내고 계시다고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하지만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내가 그만큼 TJ를 좋아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갖고 있는 연민과 눈물이 많은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세면대 앞에서도 계속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하루종일 TJ 생각이 났다. 더 친밀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챙겨줬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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